부활복음을 왜곡하는 분들에게 5.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원글 있는곳: http://ikccah.org/board_pjuB87/5812)
필자는 애틀랜타에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평범한 목사이며 성경 연구가일 뿐입니다. 반론을 제기한 이유는 김성로목사에 대한 정이철목사의 독단적인 주장은 극히 주관적이며 편협적인 관점으로 전달된 왜곡된 주장임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는 바른믿음 측에 이 문제를 제기 했지만 제 아이피를 차단하고 제가 반론한 글들을 강제 삭제하여 진지한 소통의 기회를 정이철목사께서 대표로 있는 바른믿음 측에서 무시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타 언론사를 통해 정목사님의 왜곡된 주장들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
정이철목사님의 주장들은 바른믿음 사이트와 기타 인터넷 신문들을 통해 참고 했고 김성로목사님의 관한 자료들은 유트브에 링크된 설교와 한마음교회 책자들, 칼럼, 성도들의 간증을 토대로 분석하였다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목사님과는 같은 침례교단에 소속된 목사라는 공통점 외에는 개인적, 공개적으로 전화 통화나 만난 적이 없는 관계입니다. 오해나 편견을 잠시 내려놓고 저의 주장을 찬찬히 읽어 주셔서 객관적으로 판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논박하는 과정 속에 정이철목사님께 인격적인 모독이 느껴지신다면 이해 부탁드립니다.(필자 주)
문제 제기
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른 성경해석이다. 정이철목사가 주장하는 대부분의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은 주관적이며 자기도취적인 해석들이다. 정이철목사의 성경해석이 왜 자의적인 해석인지 개혁주의 성서해석을 바탕으로 논박하고 성경적 성령론과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적인 중심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기로 한다.
1.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이철목사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교 신자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믿음을 선물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교는 부활이라는 증거가 믿음을 일으킨다고 강조하지만, 예수는 다르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0:29) 라는 구절을 통해 정이철목사는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증거는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정이철목사의 주장은 자기 주관적 교의신학의 편협적인 신학의 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자의적이며, 자기도취적인 해석임을 보게 된다. 본문의 단어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보지 못하는 것과 증거는 별개의 의미이다. 김성로목사가 말하는 것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말씀하고 있다. 즉 재판의 판사가 사건을 직접 보고 판결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오직 증거와 증인 사건 정황을 통해서 사형, 무기징역, 다른 형을 판결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도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이다
본 구절의 해석을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16장 14절의 말씀을 통해 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여기서 본 자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11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즉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했는데도 듣고도 제자들이 역시 믿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것은 본 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결국 보지 않고 믿는 다는 것은 결국 본 자들의 말을 믿는 것이다. 라고 해석해야 바른 해석이다. 그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 증거를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증거없이 하나님을 믿는 다면 기독교는 관념, 신념, 전제적이며 주관적인 종교로 전략 될 수 밖에 없다.
초대교회가 맛디아를 세운 이유를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1:22) 즉 부활을 증거할 증인을 세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우물가의 여인의 믿음은 예수와 대화하다가 순간적으로 생긴 믿음?
정이철목사는 우물가의 여인의 믿음은 예수와 대화하다가 순간적으로 생긴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자의적 성경해석이다. 예수와 대화하다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심으로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표적은 그 여인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깊은 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장 25절은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이 구절은 예수의 신성 즉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심판자의 능력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을 누구의 증언도 필요 없이 사람의 속에 있는 깊은 마음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본문의 수가성 여인을 소개한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인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신의 깊은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통해 보통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함으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5)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었지만 그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깊은 비밀은 점진적 계시 가운데 마지막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확증되는 것을 요한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의 첫 시작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를 선포하고 점진적인 그리스도의 계시가 죽으심과 부활사건을 통해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태초의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부활 사건을 통해 도마의 고백을 통해 증명해 보이는 것이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이다. 도마의 고백은 천지 개벽할 고백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태초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은 이 땅에 어떤 진리 보다 위대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해 성령이 오심으로 인간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다가 성령을 통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깊은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통해 예수님의 입술로 나온 증거로 믿게 된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철저히 부활은 믿을 만한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경의 대부분의 해석은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의적 성경 해석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증거 없이 성령이 믿음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이철목사의 믿음관은 현대 신사도 운동의 특징인 성령을 빙자한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간의 느낌과 감정으로 믿으려는 사상과 비슷하다.
하나님은 반드시 증거 위에 세워진 믿음을 통해서 만이 성령은 역사한다. 만약 정이철목사가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없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심각한 구원론의 문제와 신사도사상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3. 엡 2:8절의 성경적 해석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τῇ γὰρ χάριτί ἐστε σεσῳσμένοι διὰ πίστεως· καὶ τοῦτο οὐκ ἐξ ὑμῶν, Θεοῦ τὸ δῶρον·
정이철목사는 본 구절에 은혜라는 개념에 대해서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은혜를 보편적인 은혜의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본절에서 은혜는 정관사 τῇ 가 들어 χάριτί 는 명사, 여격, 여성 단수 명사이다. 세상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은혜를 말씀한다.
그 은혜의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즉 창조주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드러낸 사건을 하나님이 베푸신 최고의 은혜라고 한다. 이 은혜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며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백프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왜냐하면 천지창조 보다 더 큰 사건 부활은 악하고 음란한 우리의 마음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최고의 ‘승부수’이기 때문이다.
4. 춘천 한마음 교회 간증의 특징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증거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일한 증거를 가지고 믿을 때 같은 믿음이 되는 것이다.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요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요” 신약시대 제자들의 동일한 증거를 통해 공동체가 같은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초대교회는 동일한 복음을 증거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춘천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의 특징이 동일한 부활사건을 통해 공동체가 같은 은혜, 같은 믿음, 같은 구원을 소유한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의 마침표인 부활을 믿을만한 증거로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초대교회 제자들의 동일한 고백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 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믿음의 주여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께 우리의 눈을 고정하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기억하라”(디후 2:8)
5. 초대교회가 소유한 공통된 믿음의 내용
고린도 전서 15장 1-4절을 통해 초대교회가 어떤 동일한 믿음을 소유했는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1-4)
(이 본문에 대한 자세한 헬라어 원문 Parsing을 통한 설명은 차후에 하도록 하겠다)
초대교회가 동일하게 가진 믿음의 증거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게 된다. 도마, 베드로, 야고보, 바울 이 모두가 동일한 증거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던 것이다.
정이철목사의 주장은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하시면 그 순간 성령의 역사로 모든 성경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다. 김성로 목사처럼 믿을 수 있는 증거(부활)를 보니 믿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믿어지도록 마음의 눈을 열어주고, 깨닫고 순종하는 마음을 부어주어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와 대화하다가 순간적으로 믿음이 생겼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요 4장) “라고 주장한는 내용은 주관적 교의신학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며 신사도적 사상을 가진결코 바른 해석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믿음은 그리스도의 관한 증거를 통해 믿는 것이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성경대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증거 앞에 믿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칼빈은 “저항 할 수 없는 은혜”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임을 믿는다. 성경대로 오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섬세하신 구원의 증거들을 통해 Actively(능동적) 믿음이 아니라 거대한 증거 앞에 믿을 수 밖에 없는 Passive(수동적)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 대한 신뢰는 내가 억지로 믿는다면 나의 신념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신뢰할 만한 행동을 할때 신뢰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과 같다. 만약 나의 친구가 나를 위해 죽었다면 평생 그 친구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다. 즉 믿음은 증거의 양만큼 커지는 것이다.
예수를 창조자를 믿을 수 있는 가장 큰 증거가 무엇인가? 인간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고민이며 슬픔이다. 김성로목사가 늘 강조한 말씀처럼 부활은 인간 역사상 천지 창조 보다 더 큰 사건이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표적이 된 엄청난 사건이며 이 믿음을 통해 인간의 저주인 내가 주인되어 살았던 악한 죄가 부활의 표적으로 예수님이 주인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 밖에 없는 것이다.
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실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 ὑπόστασις'는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 입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객관적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증거'의 헬라어 '엘렝코스'는 법률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으로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이것이 믿음에 능력이다. 이 믿음은 어떤 증거를 소유하는냐에 따라 달라진다. 즉 증거크기와 믿음은 동등하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을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 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사 41;21-22)
그래서 믿음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 설교는 그리스도의 관한 변증적인 설교가 필요한 시대이다. 전도학의 관점에서 사도바울의 설교는 교리설교가 아니라 철저한 부활을 통한 변증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 뿐이라” (행 25:19)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 17:31-32)
사도행전의 복음 전도의 대상은 믿지 않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철저히 변증설교였다는 것을 기억 해야 한다.
김성로목사가 현대교회가 사도행전에서 서신서로 뛰어 넘었다는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확장되는 시기였으며 철저히 예수님을 믿지 않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변증적인 설교였다면 서신서의 대상은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교회가 사도행전의 변증적 설교를 통하지 않고 교리적인 설교를 듣기 때문에 말씀이 전제적이며 종교적이 되는 것이다.
즉 변증적 설교를 통해 믿음을 확증 후에 교리화가 되어야 한다. 정이철목사의 주일 설교 중에 한 성도가 “목사님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믿음이 안생기는 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했을때 정목사는 때가 되면 성령께서 믿음을 주십니다. 아주 무책임한 말이다. 성경에 어디에도 그런 대답이 없다. 믿을만한 증거를 줘야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복음은 거침이 없다. 왜?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설교는 단순하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3일만에 죽음과 부활이 일어났지만 하나님은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셔서 1400년의 성경의 역사안에 계시하시고 준비하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나님편에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이땅에 오신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미친 사랑이 아니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인 것이다.
7.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초대교회는 십자가 중심의 변증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인 것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동일하게 춘천 한마음교회도 부활을 증거하는 근본 이유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핵심이 있다. 즉 한마음교회가 부활(죽으심과 살아나심)을 강조하는 이유가 정이철목사가 주장하는 신부활교, 부활님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예수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즉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말씀이 육화되어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핵심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결국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몸의 기능적인 관점에서 부활이 심장이라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적인 생명을 제공하는 피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피가 건강해도 심장이 건강하지 않으면 혈액은 몸에서 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본질은 그리스도이다.
정이철목사는 김성로목사의 설교을 왜곡 편집하여 부활을 강조한다는 이유는 ‘신부활론’ ‘부활님’이라는고 하는데 말할 가치가 없는 상식이하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무엇이 선포되어야 하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로 끝나면 ‘ So What?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개념: 나사로의 부활과 차원이 다른 완전한 죽음에서 부활과 승천)
그런데 부활은 신성모독죄로 죽은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 것이 증거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감추고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인 ‘부활’을 싫어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변증학에서 참된 명제는 반드시 증명이 되어야 하는데 기독교의 명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증명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사건이 사도들이 생명걸고 전한 최고의 증거였다는 것을 보게 된다.
제 개인적인 견해는 춘천한마음교회의 성도들의 간증과 김성로목사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한마음교회의 중심 신학은 십자가 신학이나 부활신학이 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인 것을 보게 된다.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부흥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부활(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 이 선포되지 않으면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쪽은 십자가, 한 쪽은 부활로 그리스도가 이땅에서 행하신 속죄와 완전한 구속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성경 전체의 중심은 십자가라고 했는데 그것은 편협적인 생각이다. 왜 편협적인지는 인간의 완전한 구속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겠다. 성경 전체의 신학은 결국 그리스도 신학이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이며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골 2:2)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 3:4)
8.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의 핵심 명제
초대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무엇을 증거했는지를 확인하면 그들의 신학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철저히 그리스도가 중심이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 5:42)
“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 9:22)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3)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 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행 18:28)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3)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 4:10)
9. 핵심 명제의 마침표를 찍는 증거
부활이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롬 1:4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사건을 통해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1:2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 (행 2:32)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행 4:2)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행 4:33)
10. 성령의 내주하심은 반드시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를 통해서이다.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깨끗하지 않으면 임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천국의 최고의 가치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가 완전히 나의 주인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진 자의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은 성령이다.
“성령이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이로냐” (갈 3:2)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정확한 표현으로 사도들도 부활의 증인이지만 순종하는(믿는 것)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 증인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즉 성령 사역의 일차적, 본질적 사역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구절이다. 그래서 김성로목사는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 성령이 내안에 계시지 않으면 부활을 선포할 수 없다.
정이철목사는 춘천한마음 성도들을 향해 “이들에게 은혜란 없다 부활을 소리 높여 외치는 동료들이 많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 십자가로 올 수 있는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것은 왜 부활이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10년 이상 설교는 거의 들을 수 없고, ‘전능자가 이 땅에 오셨다 가셨다.’ 믿을만한 증거 부활, 부활에 관련된 성경구절 몇 마디, 그리고 부활간증 이것이 10년 이상하고 있는 예배의 전부다 성도들은 부활에 세뇌된 상태를 변화라고 착각하고 속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의 신앙이 없다. 누구나 부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춘천한마음교회가 외치는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것이며 부활로 증거하는 것이다. 이 믿음 안에 십자가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십자가로 조명되는 것이다.
1) 정이철목사에게 묻고 싶다. 춘천 한마음교회 성도 한사람이도 직접 만나서 대화 한 적이 있는가? 한마음교회 예배를 참석한 적이 있는가?
2) 어떻게 한 번도 만나보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단정할 수 있는가?
3) 춘천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처럼 남은 인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4) 한가지 묻고 싶다. 김성로목사의 설교와 칼럼, 한마음교회의 책자들을 제대로 확인했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정이철목사의 주장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여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상식 이하의 질문을 하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필자는 한마음책자와 설교를 최소 20번 이상을 꼼꼼히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최소 몇번을 보고 이단이라고 단정하는가? 만약 모든 조사가 끝난 후에 김성로목사의 이단성이 사실이 아니고 왜곡된 편집이라면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한 정목사 뿐만 아니라 정목사를 지지했던 타목사들까지 남침례교단은 문제 제기를 할 것이며 반드시 그의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것은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분당 우리 교회 이찬수목사께서 이옥매 할머니의 간증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이 이옥매할머니 안에 있는 부활의 기쁨이 단순히 쇼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춘천 한마음교회의 거짓된 연기에 속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부활(죽으심과 살아나심과 승천) 천지 창조 보다 더 큰 사건이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직접 표적이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정신은 겸손과 사랑이다. 성령의 사람은 결코 무례하지 않는다. 3년도 안된 아직 검증 되지도 않은 단체가 수 십년 동안 이단연구에 몸 담은 선배 사역자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행동은 결코 겸손하지 못한 처사이다. 부활의 가치를 모르는 정이철목사가 과연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는 것이 기적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이철목사가 주장하는 성경해석과, 성령론은 신사도적인 사상을 가진 비 성경적이며 왜곡 편집된 주장임을 보게 된다.
11. 춘천 한마음교회가 이 지경이 되어 버린 이유라고?
정이철목사는 “춘천한마음교회가 이 지경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그 이유를 예수의 부활이 믿음도 주고, 구원도 주고, 회개도 주고, 모든 것을 다 해 준다고 가르치는 부활 만능 사상 때문이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교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를 말하지 않고 부활이 믿음을 가지게 하는 오직 하나의 증거이고 표적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라고 평가했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이철목사와 함께 추종하는 몇명의 목사들과 비평의식 없이 정목사의 편집된 주장을 무조건 수용하는 성경적 기초가 부족한 분들이다.
12. 춘천 한마음 교회는
한국 강원도 춘천에 한 조그마한 시골 우사를 개조하여 시작된 교회다. 건물의 화려함도 없었다. 조직 양육 시스템 프로그램도 없었다. 무명인에 불과한 김성로 목사였다 .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을 붙들었다. 무식할 정도로 오직 사도들이 전한 복음인 부활만을 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젠 무명의 목사와 한마음교회성도들을 통하여 전 세계로 복음이 확장되는 역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치 않은가?!! 그래서 한마음교회는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하나님의 승부수라고 하는 것이다.
한 예로 한 평범한 가정주부가 남편 사업차 인도네시아 주재원으로 따라가 복음으로 교회 공동체와 신학교를 세우는 인도네시아 이매애 선교사의 간증, 중독자들이 치유되고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가정이 회복되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복음으로 기뻐하고 회복한 간증들이 다 쇼라고 생각하는가?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동일한 간증의 특징은 자기가 주인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로 믿고 주와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전도의 사명이 자신의 최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왜 일까? 복음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최고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정이철목사께서 간증은 이단들이 쓰는 수법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현대 교회에 간증하는 교회는 다 이단인가? 초대 교회사나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 초대교회의 모임의 특징은 일방적인 목회자의 말씀 선포와 가르침이 아니라 사도들의 선포와 공동체의 간증이 함께 이루어 졌다는 것을 보게 된다.
정목사의 주장은 초대배경사와 초대 교회 공동체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 주장임을 보게 된다. 내 안에 천지 창조 보다 더 큰 증거가 있고 복음이 있는데 전하지 않고 나누지 않는 것이 기적일 것이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전 5:42)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행 4:33)
(성령론에 대한 추가적 설명 후에 정이철목사와 림헌원목사가 구속사역에 하늘성소와 제사에 대해 김성로목사를 이단이라고 단정했는데 약간의 개념적 실수가 있지만, 정이철목사와 림험원목사가 주장하는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했다는 주장은 편협적인 주장이며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완전한 속죄가 아닌 완전한 구속에 있어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왜 예수님이 반드시 부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변론은 변증학적 관점이 아닌 다른 신학적 관점에서 차후에 설명 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변론할 때 자기의 편협된 신학으로 우기지 말고 성경과 함께 권위가 있는 학술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논박하길 바란다.)
필자에게 단 1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예수의 그리스도와 주인 되심을 증거한다.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 전해도 또 전하고 싶은 것이 나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시며 나의 주인되어 주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보너스다. 이 것만으로 충분하다.
주님의 부활은 나에게 산 소망과 기쁨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주기 때문이다. 나의 평생의 증거는 예수의 부활이며 나의 평생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다. “Glory of God”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
애틀랜타 뉴에덴침례교회
담임목사 이재위
[이 게시물은 CKSB님에 의해 2016-10-25 06:28:52 게시판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CKSB님에 의해 2016-11-12 09:26:44 절기 자료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CKSB님에 의해 2016-11-12 09:27:12 이단 자료에서 이동 됨]
(1) 바른믿음 장로교 정이철목사의 김성로목사에 대한 오류를 지적한다 (이재위 목사)
http://ikccah.org/board_pjuB87/5693
(2) 정이철목사의 "부활이 없어도 십자가의 희생이 완전한 죄사함을 이룬다에 대한 반론 (이재위 목사)
http://ikccah.org/board_pjuB87/5674
(3) 부활복음의 중요성을 왜곡시키는 정이철목사에게 (이재위목사)
http://ikccah.org/board_pjuB87/5713
(4) 부활의 중요성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반박문 4 (이재위 목사)
http://ikccah.org/board_pjuB87/5792
(5) 부활복음을 왜곡하는 분들에게 5.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이재위 목사)
http://ikccah.org/board_pjuB87/5812
정이철 목사의 이단성 12가지 (김한길 목사)
그리스도의 기독론에 위배된 정이철/이창모/림헌원 목사의 이단성
http://ikccah.org/index.php?mid=board_pjuB87&document_srl=5706&comment_srl=5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