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자료

일요일 성수하는 역사적 배경

관리자3 0 6,319 2014.09.20 21:16

일요일 성수하는 역사적 배경

주일예배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고 또 몇 성경 절들을 주일 예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모두 성경의 원 뜻을 벗어난 것들이며 사실상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고 인정을 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정하신 그 기원을 역사에서 찾아보며 성경적으로 제시해 보기로 하자. 이 자료는 마지막에 성경으로 답을 제시하였다. 중간만 보고 엉뚱한 소리하지말기를 바란다.

  

일요일 예배의 기초

첫째로,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26:30)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휘파 될 것이며”(6:4)”

일요일에 예배는 드리지 않았지만 일요일 예배의 기초는 창조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 일요일 예배의 노선으로서 구약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둘째로,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 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 하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하겠느냐”(8:16-17)

성전 안에 가증한 것들을 세움.(11:16, 6:1-6, 8:1-7)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며 우상숭배의 장소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셋째로,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22:8)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22:26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될 무렵

미트라 종교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종교로 기원전 1세기경에 로마로 들어왔다. 태양신 미트라는 주로 군인 층에서 열렬히 신봉하였는데 이후 귀족과 황실에서 받아들여 제국과 황제의 수호신으로 격상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될 무렵에는 이 미트라교가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되어 있었다 

로마 교회의 시작

기원전 61년의 폼페이에 의한 전쟁 포로로서 로마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포로들은 그 후에 석방되어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강력한 구성원들을 이루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인 기원후 57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은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었다 

종교 갈등의 발단

1. 바울은 로마에 복음증거하기를 원했는데 길은 모두 로마로 통하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갔으며 사도행전 후반부에 배타고 로마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황실에까지 복음을 전했다 

2. 하지만 로마의 궁전 안에서는 이교도 제사를 매일 드리고 있었는데 황실의 여자들이 복음을 받은 후 제사를 드리지 않자 곧 로마제국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3. 복음이 군대에까지 들어갔다. 고넬료를 비롯해서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후로 총을 버리고 제대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러자 군대는 약해지기 시작했고 로마제국과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4. 이 미움이 유대인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대인은 원래부터 속국으로서 로마와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 황제의 핍박

1. 기원후 647월에 네로황제는 신도시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시민들이 반대했다 

2. 로마시에 큰 불이 나서 시 전반을 태우자 시민들 사이에 우리가 신도시 개발을 반대해서 네로황제가 불을 일부러 놓았다라고 소문이 나자 네로 황제는 이것을 다시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3. 이때부터 네로황제의 핍박이 시작되고 그 때 바울이 죽고 베드로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4. 기원후 66년에 유대인들이 독립반항운동의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는 칼과 철로 대항했고 이 때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 반란에 기독교인들은 참여하지 않았었다.

5.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

1.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는 유능한 정치가였고 많은 속국들과 화친 정책을 펴서 매우 안정된 정치를 했다. 그 당시 반란이 심하던 유대인들과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소원을 따라서 기원후 130년경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가를 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막대한 건축 자금을 거두었다.

2.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황제를 숭배하라

토라(모세오경) 사용금지

안식일 예배 금지  

3. 얼마 후, 황제는 모든 속국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유대인들이 반발하였고 황제는 보복으로 할례의식을 금지시켰다. 유대 랍비들의 항의가 일어나자 황제는 분노하여 성전 재건 령을 취소하였다.

4. 기원후 132~135년 사이에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다. 황제는 로마 군대로 초토화시키면서 유대인의 마을 985개를 전멸, 80만 명이 죽었다  

5. 이미 내세웠던 세 가지 금지령을 내리고 어기면 사형으로 다스렸다. 

기독교인에게 문제발생

1. 이 결과로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문제가 생겼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모두가 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 반란으로 인한 금지령 속에 포함된 안식일 준수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까지 해당되는 칙령이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

구약성경을 사용한다는 점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점  

2. 로마제국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동일시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면 박해를 했다. 왜냐하면 아래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교부들의 변증서

1. 그래서 당시 교부들은 우리는 반항도 안했고 감정도 없으니 핍박 말라면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취급해 달라고 변증서를 내면서 계속 요청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박해는 계속되었다 

2. 결국, 교부들은 유대인들과의 차별화와 로마의 이교도들과의 동질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의 차별화와 이교도와의 동질화를 위해서 안식일 대신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예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교회에 도입하게 된 것이고 교회 내부에 분란이 일어났다.

안식일을 계속 지키려는 무리들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려는 무리들

두 날을 모두 지키려는 무리들  

3. 일요일 준수가 즉시로 안식일 준수를 대신하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은 계속 두 날을 같이 지켰다 

변증적 교부들의 타협에 의한 배도

1.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일요일을 지킨 역사상의 증거는 '바나바의 서신'(15)'저스틴 마터'"첫 변증서"(First Apolozy, 67)에 나오는데, 이것들은 기원후 150년경의 것이다. 두 경우에 있어서 다 같이 안식일 준수를 비난하고 일요일 준수를 권장하고 있다 

2.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일컬은 최초의 믿을 만한 증거는 경외서인 "베드로의 복음"'알렉산드리아''클레멘트'(Miscellanies, V. 14)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모두 제2세기 말경의 것이다 

3. 200년 동안 핍박을 당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유대인의 모든 풍습을 회피하고 경멸하며 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다고 열심히 황제에게 변증하는 글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는 무리가 발생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점차 정치상황에 맞춰 안식일도 지키고 또 일요일에도 모임을 가졌던 습관이 있었음을 바나바의 서신, 저스틴 마터의 글, 도마의 복음서, 폴리캅의 순교 등에 나타난다 

4. 기독교 교회 지도자 두 명이 핍박에 못 이겨 이교도와 타협에 의한 배도에 이른 과정을 보자. 첫 변증의 내용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므로, 다르게 취급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로마황제는 그 변증을 거부했고, 그러자 그 후 변증의 내용이 바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5. 저스틴 마터의 변증 (기원후 100-165)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84:11)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빛은 예수님이요, 어두움은 이 세상이다.

영광중에 재림하시므로 일요일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일요일이 주의 날이다.

일요일을 신성시해야 핍박이 없어지므로 일요일에 성도들을 모이게 하고 태양을 향해 기도하게 함. "소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르는 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회집합니다!" <저스틴 마터 변증서  

6. 마르시온의 변증 (기원후85-160)

안식일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날이다. 이토록 슬픈 날에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 하면서 금식일로 지정.

안식일에는 성만찬도 폐지하고 우울하게 보내다가

일요일에 만찬을 벌이고 축제의 날로 지정해서 일요일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나중에 이단시 되어 로마교에서 쫓겨났는데 (기원후 144) 이는 영지주의의 창시자이다  

7.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무시무시한 핍박이 있었던 서머나 교회 (AD 100-313년까지)시대에 초대교회 이른 비 성령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후, 사단은 그냥 놔 둘 수 없어 이때부터 황제 6명 이상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으로 다스리던 시대였다.

(트라얀, 아우렐리우스, 막시미누스, 데시우스, 발렐리안, 디오클레시안 황제로서,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온건정책을 쓴 콘스탄틴 황제 전까지)

이때 많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당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감소되지 않았다. 계시록 2장의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그것을 증거 해준다.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서머나 교회 참조   

로마황제의 기독교 공인  

1. 로마제국의 정치지도자이면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기원후 284-305)는 기독교에 대한 "인종청소"를 실시할 정도로 심한 박해를 가했지만, 뒤를 이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기원후 304-337)는 기독교와 타협(내지 유착)을 시도한다. 이는 기독교를 권력유지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병상에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했더니 국고만 바닥나고 나라만 분열되었으니 차라리 그들을 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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